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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루이자와를 알다

About Karuizawa

카루이자와 고원의 풍토

시원하고 깨끗한 풍토를 느낀다

가루이자와 고원은 아사마산의 남쪽 기슭, 표고 950m에서 1200m의 완사면에 있다.
이 고원은 냉량한 여름 기후, 배수가 좋은 고조한 대지, 풍부한 삼림지대 등 피서에 적합한 기후풍토를 가지고 있다.
피서지로서의 가루이자와를 찾아내 넓힌 것으로 알려진 선교사 알렉산더 크로프트 쇼씨는, 가루이자와가 가지는 기후 풍토를 “hospital without roof”(“지붕이 없는 병원”)라고 부르고, ──천연의 사나트륨( 요양소)라고 해, 카루이자와의 풍토를 상판하고 있다.

특히 특필해야 할 것은 한여름에서도 시원한 고냉지 기후일 것이다.
도쿄에서는 낮의 최고 기온이 25℃ 이상이 되는 「하츠일」이 106일간도 계속되지만, 카루이자와는 한여름에서도 시원한 고냉지 기후이다.
가루이자와의 8월 평균 기온은 20.5℃이며, 도쿄에 비해 5.5℃ 낮다. 이것은 도쿄의 5월 하순부터 6월 상순까지의 기온이다. 게다가 7월에는 23일간, 또 8월에는 20일간도 농무가 발생한다. 이 “무시 기후” 때문에 체감 온도는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들이 카루이자와의 자연이 피서지로서 적합한 이유인 것이다.

또, 카루이자와에는 전나무, 미즈나라, 코나라, 시나노키, 코브시 등의 많은 수목이 자연림으로서 자생해, 그 청량한 기후를 보다 신선하게 느끼게 하고 있다.
가루이자와는 적설이 적기 때문에 토양이 동상하기 때문에 너도밤 나무는 자생하지 않는다.
이 가루이자와의 자연림 중에서 눈에 띄는 나무는 코브시로, 마을의 나무로 지정되어 있다. 4월 말이 되면 2만개 있다는 코브시가 호화로운 꽃을 피운다. 다른 나무 사이에 흩어져 피는 콥시 꽃은 가루이자와 고원에 봄 방문을 알린다.
또한 가로수에는 낙엽송, 가발, 토치, 전나무 등이 식림되어 있다. 구가루이자와의 별장은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세워진 것이 많다. 이 별장은 넓은 나무 사이에 느긋하게 둘러싸여 건물은 초록에 보이는 숨어있다.

가루이자와 고원의 지형과 지층을 보면, 아사마산의 남쪽 기슭의 완사면에서, 분출한 화산초와 화산 회토가 지표를 덮고, 또한 지하에는 경석층이 두껍게 퇴적하고 있다. 거기서 상당량의 강수가 있어도, 지하에 침투하기 때문에, 깔끔한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가 오면 테니스, 골프장 등 스포츠 시설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그리고 카루이자와에서는 장엄한 아사마산을 바라볼 수 있다.
가루이자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아사마산은 큰 활화산으로, 동서 20km, 남북 33km에 달하는 화산 바닥을 가지고 있다.
그 미나미 기슭에는 카루이자와쵸, 오요다초, 코모에시, 사쿠시라는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또 북기슭에는 군마현 아즈마군 나가노하라마치와 미코이무라가 있다. 나가노하라마치는 키타카루이자와라고 불리고 있다. 또한 오요다초는 니시카루이자와라고 불리지만, 이들 지구는 가루이자와초의 행정구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카루이자와쵸 동사무소가 있는 가케가케 지구가 나카가루이자와, 카루이자와역 부근은 신카루이자와, 카루이자와 72 골프장 근처를 미나미카루이자와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구 가루이자와 숙소와 그 주변의 별장 지대는 메이지 시대부터 구 가루이자와 혹은 구도라고 불리고 있다.

일본 최초의 「고원 지역명」

실은 카루이자와는 일본 최초의 ‘고원’이기도 하다.
옛날 ‘고원’이라는 용어를 볼 수 있는 것은 시마자키 후지무라의 사생문 중이다.
메이지 32년(1899) 4월 시마자키 후지무라는, 코모모 요시츠쿠의 교사로서 코모토마치에 부임했다. 다음 메이지 33년(1900)부터 『치곡가와의 스케치』의 집필을 시작하고 있다. 이 『치쿠라가와의 스케치』의 초의 「고원 위」라는 장에서, 노베야마바라에 있어서의 마시에 대해서, 300마리의 말과 4000여의 사람들이 만난 성황상을 쓰고 있다. 후지무라는 코모모 요시츠카의 수학여행에서 학생의 인률도 하고 있다. ‘치쿠가와 강의 스케치’에서 ‘고원’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다.
이 고원이라는 용어는 에도시대의 일본에는 없었다.

가루이자와 고원이 고유의 지역명으로서 사용된 것은, 메이지 40년대이며, 20세기의 초두이다.
메이지 말에 발행된 사진 그림엽서에는 영어로, karuizawa plateau(가루이자와 고원)라고 쓰여 있다.
카루이자와 고원이라는 고유 지역명을 최초로 채용한 것은 카루이자와였다.

덧붙여서, 시가 고원이라는 지역명을 사용한 것은, 다이쇼 7년(1918)이다. 시모다카이군군 회의장이, 나가노현 지사에게 내린 진정서에, 시가 고원의 명칭이 이용되고 있다.
이어서 스와의 타테시나 고원의 표기가 쇼와 초기부터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노베야마 고원을 비롯한 나가노현 아래의 고원 대부분이 ‘고원’을 자칭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30년대가 되고 나서다.

~[칼럼] 카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카루이자와의 『고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고원’에 그려진 호소카와 후작 저택과 마에다 공작 저택은 카루이자와의 별장지의 전형이다.
‘고원’은 주간 전쟁이 가혹한 쇼와 14년(1939) 카루이자와 고원을 무대로 쓴 단편 소설이다.
그 중 젊은 남녀가 언니의 장려로 호소카와 후작 저택을 방문하지만 樅・落葉松・桂의 가로수가 아름다운 것을 문장으로 쓰고 있다.
가와바타가 楡라고 쓴 가로수는 사실은 가쓰라였다. 다이쇼 7년(1918) 무렵 심어진 가쓰라에 여성적인 상냥한 모습과, 樅의 남성적이고 강하게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것과, 그 중간에 낙엽송이 날씬한을 솔직하게 늘리고 있는 것과, 각각을 궁리한 배합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멋진 대조가 느껴졌다고 카와바타는 말하고 있다. 그 근처에 다른 나무가 섞여 있지 않은 것도 좋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가로수길은 일간 이상의 폭원이 있어 호소카와씨 일가의 승마의 길이 되었다. 「고원」이 쓰여져, 80년간의 세월을 거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구 호소카와 저택, 구마에다 저택을 방문하면 나무는 성장하고 있지만, 나무의 배합도 형태도, 그 당시의 그대로 볼 수 있다. 「심어졌을 때의 질서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라고 카와바타가 말하고 있는 대로이다.
호소카와 저택은 자동차 메이커, 마에다 저택은 화학 섬유 회사의 소유가 되었지만, 정원과 건물은 일부를 제외하고 건설 당시의 경관을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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