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루이자와의 문학비
가루이자와는 예로부터 문학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리고 많은 문인들과의 인연을 전하는 기념비나 동상 등도 많이 존재하며, 마을 곳곳에서 그 감성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그것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만요슈(万葉集)가비(万葉集歌碑)
-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집 『만요슈』20권에 우스이 고개의 노래가 두 편 수록되어 있다. 가비는 그 두 수를 새겨 1967년(쇼와 42년)에 가루이자와초가 구 우스이 고개 전망대에 건립했다. <’해질녘에 우스히의 산을 넘는 날은 남편의 소매도 소매에 흔들고'(마키 14권, 요미토모노무카), ‘히나쿠모리 우스히의 언덕을 넘으면 시마다 누이를 그리워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마키 20권, 오시다베노코이와사키). 남편을 생각하며 부른 노래. 후자는 방인으로 가는 남편이 아내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 당시 고대 히가시야마 도로는 나카산도 루트보다 남쪽의 이리야마 고개 부근을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 ~하나니야 가비 ~ 하나니야의 가비
- 세상에 하나하나 집의 비로 불리는 숫자 가비. 구 나카산도(中山道)변에 큰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1783년(덴메이 3)의 아사마 대분화로 매몰되었고, 그 후 홍수로 떠내려가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막부 말기 무렵, 고갯길에 있는 구마노 신사의 신사가 이 노래의 멸실을 두려워하여 이곳에 재건했다고 한다. 고개에서 가미슈 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있다. <팔만삼천팔 삼십삼천팔 삼육구삼십삼십삼십사십사십칠 백사십사억사십육>(산길은 춥고 쓸쓸하고, 한 집에 밤마다 서리가 내리고, 백 밤마다 서리가 내리고)
- ~바쇼 구비 ~ 바쇼 구비~.
- 에도 전기의 하이쿠 시인 마츠오 바쇼(1644-1694)의 『사라시나 기행』1688년(겐로쿠원(元禄元))의 <후키바스(拭き飛ばす 石も浅間野分かな(흙을 닦아내는 돌도 아사마 야부카나)>라는 구절의 비석. 바쇼의 백주기에 해당하는 1793년(간세이 5) 8월, 사쿠의 춘추안렌(春秋庵連)에 의해 오오분의 센겐 신사 경내에 세워졌다. 춘추암 장翠의 붓이다. ‘사카시나 기행’은 바쇼가 문인 오치에츠진(越智越人)과 함께 오와리에서 기소로(木曽路)를 거쳐 신슈 사카시나 마을인 이바시야마(姨捨山)로 달구경을 갔을 때의 기행문이다. 또한, 바쇼 구비는 마을 내에 한 기 더 있으며, 위치는 구 카루이자와의 쇼씨 기념비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다. 구절은 <말을 타고 가는 눈의 내일이여>(고코우지 음행의 구절)이다. 이곳은 1843년(덴포 14), 가루이자와의 시인 고바야시 다마호(小林玉蓬)에 의해 세워졌다.
- ~타고르 기념상
- 인도의 시인 타고르(1861-1941)가 1916년(다이쇼 5) 방일 당시 8월에 가루이자와를 방문하여 미쓰이 저택에 머물며 일본여자대학의 수련회에 강사로 초청되어 학생들 앞에서 ‘기도’에 대해 강연을 했다. 이 동상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타고르 탄생 120주년인 1980년(쇼와 55년)에 일본 타고르 협회 등에 의해 고개 전망대에 세워졌다. 다카다 히로아츠(高田博厚) 작품. 뒤쪽 벽에 그의 말 ‘인류불전(人類不戦)’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요사노 히로시(与謝野寛)・아키코(晶子) 부부의 가비
- 1921년(다이쇼 10), 시인 요사노 히로시(与謝野寛(1873-1935)・아키코(1878-1942) 부부가 호시노 온천 메이세이칸에 머물며 많은 노래를 남겼다. 이때 지은 노래를 바탕으로 1971년(쇼와 46년) 당시 호시노 온천 당주 호시노 가스케(星野嘉助)가 명성의 연못가에 건립했다. 비석에는 부부의 노래가 한 구절씩, 각 필체의 유려한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일촌의 작은 새의 일, 명성의 연못에서 노니는 초가을의 사람, 초가을에 놀다,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산게의 산골짜기 왕의 머리카락, 아키코> 현재 가비는 잠자리의 연못 근처로 옮겨졌다.
-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郎)의 종언지 비석
- 소설가 아리시마 다케오가 잡지 기자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와 1923년(다이쇼 12) 6월 9일에 정사한 미카사의 별장 ‘조게츠안(浄月庵)’ 터에 세워진 비석. 아리시마 쿠마(有島生馬)의 웅혼한 붓으로 아리시마 다케로 종언지라고 새겨져 있으며, 왼쪽에는 스이타 준스케(吹田順助)의 『갈대의 노래』에 나오는 ‘혼돈의 비란’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쓰여져 있다. 비석 옆에는 ‘틸다에게 보내는 우정의 비'(아리시마가 틸다에게 보낸 영문 편지)도 있다. 정월암은 1989년(헤이세이 원년)에 미카사에서 옮겨졌던 신가루이자와에서 가루이자와 고원문고 부지 내로 재건립되었다.
- ~마사무네 백조 시비 ~마사무네 백조 시비 ~.
- 롯본즈지(六本辻) 옆에 별장을 두고 오랫동안 가루이자와를 사랑한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마사무네 백조 시비는 니테바시(二手橋)의 안쪽, 이치몬지산(一文字山)의 중턱에 고즈넉하게 세워져 있다. 마사무네 백조가 애송한 그리스 시가 백조의 붓으로 십자형의 스웨덴산 검은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돌 아래에는 애용하던 만년필이 들어있다고 한다. 백조 사후 니와 후미오(丹羽文雄)의 발안, 저널리즘, 문단의 헌금으로 1965년(쇼와 40년) 7월에 건립되었다. 타니구치 요시로(谷口吉郎) 설계. <하나사우비 꽃의 생명은 몇 년이 지나면 꽃은 없어지고 가시만 남으리라>.
-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시비
- 1921년 8월, 호시노 온천에서 열린 자유교육 여름 강습회에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1885~1942)도 강사로 참가하여 아동 자유시에 대해 강연했다. 이때 낙엽송 숲을 산책하며 탄생했다고 전해지는 시 ‘낙엽송’은 1921년(다이쇼 10) ‘명성’ 11월호(창간호)에 발표되었다. <가라마쓰의 숲을 지나서. 가라마쓰의 숲을 지나서. 가라마쓰는 녹이 슬어가고 있다. 다비유키는 녹이 슬어가고 있다. >(제1연)으로 시작하여 제8연까지 이어진다. 시비는 1969년(쇼와 44년)에 가루이자와초가 자연석을 사용하여 호시노 온천 입구의 유카와 강변에 세웠다.
- ~무로사이세이 세이 세이 세이 세이 문학비
- 무로사이 세이세이는 1960년(쇼와 35년) 『가게로후 일기 유문』이 노마 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문학비를 세웠다. 시 선정, 설계, 건설 비용 등 모든 것을 스스로 했다. 위치는 니테교(二手橋)를 건넌 야가사키 강변이다. 시는 『학』1928년(昭和3년)에 수록된 「슬픈 생각」이다. 비석 옆에는 사이성이 중국 동북부를 여행할 때 구한 두 개의 용인이 서 있다.
- ~나카니시 고도 시비 ~ 나카니시 고도 시비 ~.
- 야생조류 연구가로서 자연보호운동을 계속하며 ‘일본야조회’를 창설하고 애조운동을 전개한 시인 겸 시인 나카니시 고도(中西悟堂, 1895-1984)의 시비. 나카니시는 가루이자와에서도 자주 탐조회를 열어 지역 주민들로부터 존경과 감사를 받았다. 1979년(쇼와 54년) 야조노모리 입구에 세워졌으며, 자필 시 ‘고코조타카하라’의 전문이 새겨져 있다. 그 후 1986년(1986년), 어깨에 작은 새가 앉아있는 나카니시의 흉상이 비 옆에 추가되었다.
- ~나카무라 쿠사다오(中村草田男) 시비
- 인간 탐구파로 불리며 ‘만록(萬緑)’을 주관한 하이쿠 시인 나카무라 쿠사다오(中村草田男, 1901~1983)의 시비가 2004년 8월 만록동인회에 의해 성바오로 카톨릭교회 뒤편에 세워졌다. 받침대를 포함한 높이 80㎝ 정도의 자연석 뒷면에 <팔월에도 낙엽송이 옅은 소회당>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표면은 성모자상 부조. 회당이 창건된 이듬해인 1936년(쇼와 11년)부터 아내의 손에 이끌려 매년 여름 미사에 참석했다고 한다.